[제173호] 권지민 전문연구원 - 이질적 민족주의와 통일 정체성 : 광복 80주년에 다시 보는 한반도
-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공용/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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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호
권지민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북한 이질적 민족주의와 통일 정체성 : 광복 80주년에 다시 보는 한반도
2025년은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80년간 한반도의 현 대사는 일제강점기의 수난에서 해방, 곧이어 분단, 그리고 남북한 체제의 고착화라는 격동 의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 이 역사적 과정은 단순히 정치·군사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남 과 북이 각각의 체제 속에서 민족정체성과 국가 정당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내면화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특히 남북한이 민족주의를 체제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 왔다는 점에서, 오늘날 통일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이 '이질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초로 한 정치·경제 질서 속에서 비교적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남한의 민족주의는 문화적 자긍심보다는 실용적, 시민적 기반의 정체성 형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는 타자에 대한 포용성과 유연성을 강화시 켰지만, 동시에 '민족'이라는 정체성의 개념을 상대화하는 결과도 초래했다. 남한 사회 내에 서 민족주의는 점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통일에 대한 태도 또한 현실적 조건과 국제정세를 고려한 실용적 접근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이고 이념 중심의 민족주의를 고수해 왔다. 북한의 민족주의는 반제·반미 구호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국가주의적 성향을 띠며, 체제 수 호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해 왔다. 북한의 이 같은 민족주의는 외부 세계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내부 통제 강화라는 방향으로 귀결되었으며, 남한과의 민족 공동체 담론조차도 체제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양상을 보 였다. 결국 이는 남한과 북한이 동일한 '민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의미와 내용은 판이하 게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차이는 상호간의 오해를 심화시키고, 통일의 명분과 필요 성에 대한 인식에도 큰 간극을 만들어냈다.
통일 담론 역시 남한 내부에서조차 시대와 정권에 따라 그 접근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1990년대 이전에는 '반공'과 '흡수통일'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에는 교류와 협력을 강조하 는 점진적 통일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조차도 정권 교체에 따라 흔들리는 모 습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통일 담론은 국민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 채 점점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최근 세대에서는 통일을 낭만적 이상이 아닌, 실질적 비용과 위 험 요소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 이질화된 사회제도, 안보 리스크 등은 통일 이후의 불확실성을 부각시키며,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전략적 사 고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이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분단의 고통이 여전히 우리 삶에 구조적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통일은 여전히 우리가 포기할 수 없 는 국가적 과업이다. 분단은 단지 군사적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 배분, 외교 전 략, 교육 정책, 정체성 인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구조적 제약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는 대한 민국의 국가 역량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통일은 단지 과거의 민족적 염원을 실현 하는 상징적 사건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구조적 도약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
이제 통일 논의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초당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으로 접근할 필요 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통일한국의 민족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있다. 분단 80 년의 세월은 단순히 공간의 분리가 아니라, 사고방식과 정체성, 문화적 경험의 단절을 낳았 다. 따라서 통일 이후의 정체성을 기존의 남한식 또는 북한식 민족주의로 단일화하려는 접 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민족정체성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이는 교육, 문화교류, 역사 서술의 방식 등 다층적인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 야 한다. 예컨대, 남북 공동 역사교과서 개발, 남북 문화예술 협력 프로젝트, 청년 교류 프 로그램 등은 이러한 정체성 통합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청년 세대가 이 새로운 정체성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분단의 기 억보다 글로벌한 시민 경험에 더 익숙하며, 정치적 이념보다는 실용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민족정체성은 과거의 혈연·지연 중심적 민족주의 가 아니라, 평화, 인권, 지속가능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시민적 민족주의여야 한다. 이러 한 정체성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 다문화적 경험, 국제협력 프로젝트 등을 통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으며, 남북한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통일을 향한 여정은 단기적인 정치 이벤트나 외교적 합의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정체성과 상호 이해, 제도적 설계와 문화적 통합이 복합적으로 얽힌 장기적인 국가 프로젝 트이며, 그 과정은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과정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세대는 더 큰 단절과 갈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2025년 광복 80주년은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일제강 점기를 거쳐 분단과 대립을 경험한 한반도는 이제 새로운 80년을 준비해야 한다. 그 시작은 서로 다른 체제에서 길러진 민족주의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통 합의 정체성을 설계하는 일이다. 통일은 더 이상 '하나 됨'의 환상이 아니라, '다름 속의 공 존'을 실현해 나가는 복합적 과제이다. 이러한 통일의 비전을 함께 그려나갈 때, 비로소 한 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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