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호
박 찬 봉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통일,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2021년의 해가 밝았다. 분단 76년째 해다. 일제 35년의 두 배 하고도 6년이 넘는 해이고국제 냉전이 해체되어 독일이 통일한 지도 31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도 한민족 통일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통일 전략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새해는 2022년 봄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해가 될 것이다. 새로운 통일 전략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 결정의 요체는 그 주요 변수인 목표(ends),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ways), 가용 수단(means), 그리고 국제 환경(global landscape)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최적의 균형점(equilibrium)을 찾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전략은 실현 방안의 핵심적 요소로서, 주어진 국제환경 하에서 가용한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how) 목표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통일 전략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통일을 전략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공산권이 스스로 붕괴되고 국제적 냉전이 끝나 현실적으로 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온 1980년대 말 이후의 일이다. 이후 제시되고 추진된 우리의 통일 전략은 크게 세 가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노태우 정부가 성안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김영삼 정부가 약간 보완한 ‘한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 약칭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다. 남북 간 화해 협력-> 남북연합-> 자유민주 통일 완성의 3단계를 상정하는 이 방안은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국회와 성안 과정에서 긴밀히 협의하였을 뿐 아니라 발표 후 국회 동의까지 받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그 기본 틀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이후 역대 정부가 이를 공식 통일방안으로 수용해 왔다. 그 둘은 우파 정부가 공통적으로 채택한 압박정책이고 그 셋은 반대로 좌파 정부가 채택한 유화정책이다. 두 통일정책은 모두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수용하지만, 압박정책은 북한을 압박하여 개혁 개방의 길로 변화시킴으로써 통일방안을 실현하려 한 반면, 유화정책은 대북 지원으로 북한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의 역사는 이러한 노력들이 별로 효과가 없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0여 년 전에 비하여 오늘의 남북관계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고, 압박정책은 남북 간 긴장을 높이고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유화정책은 막대한 돈을 들인 대북지원이 핵 개발 등을 통하여 대남 위협을 증대시키고 북한의 정권 강화에 악용되는 등 역효과를 나았다는 비판을 각각 받고 있다.
통일전략의 관점에서 지난 ‘잃어버린 30년’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목표에 있어서 통일은 국정 목표에서 우선 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둘째, 역대 정부의 통일정책은 압박정책이나 유화정책을 막론하고 그것이 어떻게 통일로 현실화될 수 있는지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제시하지 못했다. 셋째, 통일을 위한 우리의 가용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끝으로 국제환경에 대해 수동적으로 끌려다녔을 뿐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따라서 새로운 통일전략은 이러한 반성의 토대 위에서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전략은 그 성격상 비공개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어 여기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상술할 수는 없으므로 전략 변수에 대한 몇가지 고려 사항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목표의 문제다. 국가 전략에 있어서 목표는 국가 이익(national interests)을 규정(define)하고 그 구성 요소들의 우선 순위(hierarchy)를 정하는 것이다. 통일을 국가 이익에 입각하여 우선 순위를 평가할 때 그것은 분단된 남한의 국익인가 아니면 남북한을 합한 국익인가?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을 대한민국의 일부로 보고 북한 주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입장이 일응 타당하다 하겠다. 현실적으로도 통일은 북한 주민들에게 큰 이익을 주겠지만 결국 남한 국민들에게도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은 독일의 통일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통일보다 우선하는 국가 이익은 없다는 점에서 통일은 국정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가오고 있는 통일의 국제 환경을 전망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체제 수준(system level)의 구도라는 사실은 Kenneth Waltz 이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소 양극의 냉전체제 하에서 남과 북이 그 한 축이 되어버린 탓에 우리의 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었다.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후 30여 년의 과도기는 우리가 통일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국제질서는 이제 미중 냉전체제를 향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차기 정부가 국정을 담당할 2022-2027년은 그 과도기의 거의 끝자락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남과 북은 다시금 미중 냉전체제의 한 축이 되어 통일된 번영은 고사하고 6.25의 데자뷰를 걱정해야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 때 핵과 생화학 무기를 가진 북한의 위협은 훨씬 가공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통일보다 시급한 과제들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북한의 핵을 비롯한 대량 살상무기 폐기,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 북한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 보장,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 남북 협력 확대 등이다. 이들 과제들은 통일의 하위 목표들이며 통일 과정에서 어려움 없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하위 목표 중 그 어느 하나가 해결된다 하여 통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책의 전략적 우선 순위는 마땅히 통일에 주어져야 한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는 1980년대 말부터 제기된 이후 공산체제 붕괴와 독일 통일 등 국제 환경이 급변하자 북한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 차단하고 한반도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 당국이 악용해 온 것이다. 우리가 핵문제 해결 후 통일을 모색하겠다고 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서 북한의 의도에 끌려다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둘째로, 방법의 문제이다. 통일은 기본적으로 남북한 양 당사자 간의 합의를 요하는데 양 측에 공히 정책 당국과 국민이라는 서로 다른 이해당사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양면게임(two-level game)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의 경우에는 정책 당국과 국민 사이에 통일과 관련하여 큰 갈등이 없는 반면 북한의 경우에는 통일을 간절히 원할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주민과 이를 저지하려는 정책 당국 간의 현저한 이해 충돌이 예상된다. 그러므로 통일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떻게 북한의 정책 결정자가 통일을 받아들이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북한의 정책 결정자들은 남과 북의 네 이해 당사자 중 세 당사자 즉 한국의 국민과 정책 당국 그리고 북한 주민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통일 즉 자유민주적 통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해 오고 있어서 그 설득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동안 압박과 유화 정책을 일관성 없이 번복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못했으므로 이제는 그 어느 하나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를 잘 융합한 정교한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자원 배분의 문제이다. 통일의 국정 우선 순위가 상승하게 되면 당연히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자원배분의 우선 순위도 그에 맞게 상향 조정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통일이라는 중차대한 국가 목표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원 또는 수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동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국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자원 또는 수단으로는 대개 ‘다임(DIME)’을 든다. Diplomacy, Information, Military, Economy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통일과 관련된 자원은 외교부, 국가정보원, 국방부, 그리고 경제부처가 각각 관장한다. 통일 전담 부서로 통일부가 있지만 정책 수단에 있어서는 이들 부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 이들 부처는 소속 공무원들이 모두 각자의 특수직렬로 법정화되어 있어 부처할거주의를 피할 길이 없다. 통일이라는 국정 과제는 국가 역량을 종합적으로 동원한 고도의 통일전략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제도적 정비가 선행 내지는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국제환경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이미 러시아와 비슷한 GDP 규모를 갖고 있다. 통일된 한국은 8천만의 인구를 가지고 경제적으로는 러시아를 추월하여 머지않아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주변국들은 그러한 통일 한국이 친구가 될지 적이 될지 불확실하므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변국들은 한결같이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그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이를 통일을 위한 국제환경적 제약 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돌파할 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 새로운 통일전략은 한민족 통일이 유엔 헌장이 명시하고 있는 민족자결권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변국은 물론 국제사회가 이에 협력할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까지의 동북아 질서는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한민족의 일방적인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이런 부당한 상황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선언해야 한다. 아울러 주변국들에게 한반도 통일 과정에 협력하는 것이 장차 통일한국과의 우호적 관계 발전에 기여할 것이므로 각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 나가야 한다.
2021년의 해가 밝자마자 새로 출범한 미국 바이든 정부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대중 강경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섰고, 북한도 제8차 당대회와 당 중앙위원회를 연이어 개최하여 변화 거부 노선을 재확인하였다. 우리의 평화통일 관점에서는 위기가 지속되는 셈이다. 그러나 전략이란 곧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한 해가 통일을 위해 잃어버린 30년을 더 연장하는 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내년에 들어설 정부가 새로운 통일전략으로 지금의 과도기적 기회를 살려 통일의 전기를 만들 수 있도록 국민적 지혜와 역량을 모으고 다듬는 해로 만들어야 한다.
●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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