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호
김 현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
북한의 코로나-19 방역, 김정은 그리고‘계몽군주’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은 전염병 발발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비록 영국과 미국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는 희소식과 치료약 개발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종식까지는 상당한 시일과 고통스런 나날이 전망된다. 특히 북한의 상황은 더욱 우울할 수밖에 없다. ‘백신 민족주의’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팬데믹의 피해 또한 불균등하게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은 코로나 바이러스 발발 직후부터 방역에 총력전을 펼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우한을 중심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던 1월 말 북한은 재빨리 국가비상방역체계를 선포하면서 중국과의 국경 폐쇄도 선제적으로 단행했다. 2월 북한 당국은 공식적으론 한 명의 코로나-19 감염자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김정은 명의 친서로 한국에 ‘방역협력’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감염자는 상당히 생겨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4 월 11일 북한은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세계적인 대유행 전염병에 대처하여ㆍㆍㆍ국가적 대책을 더욱 철저히’ 세워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방역의 고삐를 한층 죄었다.
북한은 1분기 북ㆍ중 교역이 전년 동기 대비 55% 감소하면서 국경 봉쇄로 인해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북ㆍ중 국경 개방을 추진했다. 하지만 코로나 감염환자가 재차 발생하면서 이런 개방 조치는 철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7월 7일 북한 내각은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 차단을 위해 “국경과 영공, 영해 봉쇄 계속 강화”라는 입장을 천명하면서“해상에서 밀려들어오거나 공중에서 날아오는 물체 등을 발견하는 경우 소각처리”하라는 지침을 내렸으며, 수입 물자를 통한 감염을 우려해서 국경과 해상 봉쇄를 한층 강화했다.
그런 와중에 7월 탈북민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으로 월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북한은 월북자가 코로나-19 감염자인 것으로 단정하고 개성시를 완전 봉쇄 차단하는 동시에 국가비상방역체계를 ‘최대비상체제’로 전환했다. 그 후 8월 2일 북한은 바이러스의 유입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외부와의 모든 물리적 통로를 완전히 차단ㆍ격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뿐만 아니라 8월 14일 정치국 회의에선 북한 지역의 홍수 피해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을 우려해서 외부의 지원을 일절 받지 말 것을 지시했고, 8월 말에는 조ㆍ중 국경 전 지역에서 국경을 무단으로 넘는 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도 하달했다.
방역의 강도를 극단적으로 높였던 북한은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방역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11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문제로 재차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방역 강화를 논의했고, 그 후 내부의 봉쇄조치들을 연이어 실시했다. 11월 국정원 정보위 현안보고에 따르면, 이 조치에 따라 외부 물자를 반입하는 등 방역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극단적인 경우 처형까지 하고 있으며, 11월 말에는 휴전선에 코로나 유입을 막기 위한 봉쇄장벽을 설치했고, 12월 현재는 방역 단계를 재차 초특급으로 격상한 상태이다.
북한은 1분기 북ㆍ중 교역이 전년 동기 대비 55% 감소하면서 국경 봉쇄로 인해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북ㆍ중 국경 개방을 추진했다. 하지만 코로나 감염환자가 재차 발생하면서 이런 개방 조치는 철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7월 7일 북한 내각은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 차단을 위해 “국경과 영공, 영해 봉쇄 계속 강화”라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해상에서 밀려들어오거나 공중에서 날아오는 물체 등을 발견하는 경우 소각처리”하라는 지침을 내렸으며, 수입 물자를 통한 감염을 우려해서 국경과 해상 봉쇄를 한층 강화했다. 논의에서 간과된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계몽군주’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전제군주로서 개혁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서구 학계에선 애당초 ‘계몽군주’로 지목된 군주들에게 이 표현을 붙이는 것 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런 논쟁은‘계몽군주’의 원형에 해당되는 그들의 정치적 행태가 매우 변덕스러워서 과연‘계몽’이란 수식어를 붙여줄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이른바 계몽군주의 이러한 변덕스러움은 19세기 ‘계몽군주’의 아류까지 고려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 사례가 제정러시아의 짜르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다. 그들 역시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의 물결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제군주가 중심이 되어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19세기 판 ‘계몽군주’를 자임했지만 그들의 ‘개혁적’ 전제정치의 종착지는 혁명, 군주정의 폐지 그리고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김 위원장의 의중을 반영한 이러한 극단적 방역 조치 중 하나는 국경에 무단 접근하는 사람에 대한 사살 명령이었는데, 이 명령은 9월 22일 서해 공무원 피격 살해 사건을 촉발시켰다. 해수부 소속 어업지도선 선원이 북한 지역에 들어갔다 사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사과를 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계몽군주’논쟁을 잠시 촉발시켰다. 김 위원장을 ‘계몽군주’에 빗댈 수 있는지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다만 ‘계몽군주’ 라는 평가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한다면 기존 논의에서 간과된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계몽군주’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전제군주로서 개혁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서구 학계에선 애당초 ‘계몽군주’로 지목된 군주들에게 이 표현을 붙이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런 논쟁은 ‘계몽군주’의 원형에 해당되는 그들의 정치적 행태가 매우 변덕스러워서 과연‘계몽’이란 수식어를 붙여줄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른바 계몽군주의 이러한 변덕스러움은 19세기 ‘계몽군주’의 아류까지 고려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 사례가 제정러시아의 짜르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다. 그들 역시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의 물결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제군주가 중심이 되어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19세기 판 ‘계몽군주’를 자임했지만 그들의‘개혁적’ 전제정치의 종착지는 혁명, 군주정의 폐지 그리고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계몽군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김 위원장이‘계몽군주’와 겹쳐 보인다고 한다면 우리사회가 유의해야 될 점 중 하나는 바로 역사상 발견되는 ‘계몽군주’의 변덕이며 그것이 낳은 정치적 불확실성일 것이다. 특히 ‘계몽군주’의 변덕은 정치사회의 근대화가 뒤쳐진 곳으로 갈수록 더욱 심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코로나-19로 인해 극단적 방역을 취하고 있는 북한의 ‘계몽군주’와 평화공존을 이루어가는 길을 모색함에 있어 이런 불확실성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 Issue Brief는 집필자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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