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전 정권의 건강 보험 정책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인기 영합적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말한 것이나,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형마트 휴일 휴무제를 “좌파 포퓰리즘 정책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말한 것,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에서 “말 폭탄, 경솔한 안보 포퓰리즘”이라고 말한 사례도 있다. 심지어 나경원 전 의원은 과거 자신이 해외 정책 사례를 소개한 것뿐인데 “포퓰리즘이라는 허황된 프레임을 씌워 공격” 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요컨대 우리 정치에서 포퓰리즘은 상대방을 공격할 때 쓰는 말이고, 포퓰리즘이라고 공격을 당한 경우에는 억울해서 잠이 안 오는 그런 말이다. 학자들이야 ‘진정한 포퓰리즘’ 운운하겠지만, 현실정치에서 포퓰리즘은 고상한 욕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름지기 정치가라면 상대방의 정책이나 발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에 이걸 어떤 포퓰리즘으로 불러야 할지 더 고민해야 유명해질 수 있다. ‘대해적의 시대’가 아니라, ‘대작명가의 시대’인 셈이다.
이처럼 포퓰리즘 공격을 남발하는 우리 정치의 모습이 한심해 보일 수 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도 비슷했다. 홍철기 박사(서강대 글로컬사회문화연구소)가 지난해 11월 출판한 논문 ‘포퓰리즘 개념의 냉전 자유주의적 기원’은 본래 19세기 말 농민 정치 운동을 지칭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대문자’ 포퓰리즘이 1950년대 중반 미국 학계의 논쟁과 연구과정에서 지금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소문자’ 포퓰리즘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서 역사학자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 사회학자 실스(Edward Shils), 사회학자 립셋(Seymour Lipset) 등이 냉전 (반공)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당시 매카시즘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면서 이 표현이 새로운 의미로 유행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호프스태터는 매카시(McCarthy)를 비롯한 미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겉으로는 보수주의의 언어와 수사를 사용하지만 사실 사이비-보수주의에 불과하고, 스탈린 공산주의만큼이나 전체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짧은 유행 동안 포퓰리즘은 여러 인접 개념(유의어)을 가지게 된다. ‘기업가적 급진주의’ ‘사이비-보수주의’ ‘지위 정치’ ‘편집증/피해망상 스타일의 정치’ ‘이데올로기 정치’ ‘급진 우파’ ‘중도 극단주의’ ‘반지성주의’ 등이 포퓰리즘의 주요 인접 개념으로 사용됐다. 좌우나 중도를 막론하고 극단적이거나 부정적으로 간주될 만한 것은 모두 포퓰리즘의 범위 안에 포함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낙인찍기의 이면에는 근대화된 문명사회가 (매카시 같은 사이비-보수주의가 아니라 자신들 같은) 지식 전문가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요컨대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포퓰리즘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모호한 정치적 개념으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상대방을 포퓰리즘이라고 낙인찍는 행위가 곧 그와 구분되는 자신을 규정하는 과정이라는 점은 거의 잊혀진 듯하다.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냉전 자유주의자들은 포퓰리즘의 대립쌍으로 ‘이익 정치’ ‘계급 정치’ ‘법의 지배’ ‘시민성’ ‘시민 정치’ ‘다원주의’ ‘중도주의’ ‘세계시민주의’ 등을 언급했다. 매카시즘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자신들은 이런 가치를 수호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2020년대 한국은 어떨까? 창의적인 포퓰리즘 작명가들에게 묻고 싶다. “포퓰리즘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포퓰리즘의 반대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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