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많은 규칙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하나둘 늘어났다. 신생아 때는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후에는 혼자 숟가락질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그런데 이제는 식사시간에 손 씻고 자리에 앉아야 하며, 밥과 반찬을 골고루 먹고 젓가락은 제자리에 놔야 하며,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야 하고, 다 먹은 그릇은 설거지통에 넣어야 한다. 이런 규칙에는 아이에게 바라는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역경에 직면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려 노력하기를, 가족과 소속된 집단에서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관용하기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식이다.
대한민국의 ‘우리’에게도 비슷한 바람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우리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데 있다. 전 세계에 등장한 포퓰리스트들은 종교, 조상, 민족, 인종, 성 역할, 언어, 문화, 계급, 관습, 역사 등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제들을 활용해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우리’의 범위를 점차 축소시키며, ‘우리’를 위해 ‘그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한다.
김주만(타우슨대 정치학과)과 김혜미(가우처대 글로벌 교육처)가 지난달 번역·출판한 <반(反) 포퓰리즘 선언!: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체성 서사>에서 로저스 스미스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경쟁적 서사들이 확산되면서 “민족적·종교적 타자를 배제·억압·박해하고, 겉으로는 입헌주의적 자치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독재를 확립할 가능성이 큰” 병리적 포퓰리즘이 득세하게 됐다고 진단한다. “정치는 결국 모두 정체성 정치”라고 보는 그는 병리적 포퓰리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정책적 대안보다 “좋은 국민 정체성 서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포퓰리스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집합적으로 상상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국민들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고 싶고, 그렇게 되도록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대한민국의 ‘우리’도 더 나은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스미스는 “오늘날 여러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더 권위주의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서사들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더 포용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국민 정체성에 관한 설득력 있는 서사들을 발전시킬 그럴듯한 발전방법들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우리’가 ‘기미독립선언서’라는 훌륭한 자원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1919년 3월1일의 ‘기미독립선언서’는 ‘우리’의 “자기 건설”이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을 도울 것이며, “도덕”과 “신문명”을 지향하는 “세계 문화의 대조류”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한국을 다시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는’ 독립의 상태로 돌려놓을 것을 다짐함과 동시에, 그것이 동아시아와 전 세계의 안녕에 기여하고 한국인의 창조적 잠재력이 표출되어 새 시대의 진보를 도울 수 있다고 정당화했던 것이다. 스미스는 3·1운동 지도자들이 “편협하고 순전히 공동체 내부만을 향하는 민족주의 대신에 관대하고 널리 유익함을 줄 수 있는 관념의 국민 정체성을 개진했다”고 평가한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포퓰리스트들에 대항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는 한편,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말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들이 말하는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기미독립선언서’에 그려진 사랑과 포용이야말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우리’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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