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들은 간판과 현수막으로 한글을 깨쳤다. ‘탕후루’ 같은 단어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도 귀신같이 찾아낸다. 당황스러운 순간도 종종 있다. 성인 PC방 간판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바둑이’가 뭐냐고 물었을 때는 아마 강아지는 아닐 거라 대답했다.
문장을 잘 읽게 되자 더 난감해졌다.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우리 어민 다 죽는다!’ ‘이게 나라냐!’ ‘청년 일자리 뺏는 부패노조 OUT!’ ‘Hi~ 윤틀러!’ ‘독도까지 바칠 텐가!’ ‘친일본색 매국정권’ ‘법치부정 범죄옹호’ 등 거리를 뒤덮은 정치 현수막 때문이다.
온갖 창의적인 욕설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정치인들끼리 싸우는 거라 대답했다. 우리 애들에게 정치인은 싸우는 사람들이고, 정치는 싸우는 일이 돼버렸다. 아빠는 정치학을 공부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싸움을 좋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정치질’은 권력, 지위, 이권 등을 획득하기 위해 선동, 날조, 분탕 등을 하는 행위 혹은 자신과 자신의 파벌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편 가르기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회사, 학교, 게임에서 벌어지는 ‘정치질’은 ‘사내 정치’와 같은 별도의 표현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정치’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상황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61년 11월16일자 ‘더 타임스’ 머리기사에 실린 살라자르의 말은 마치 우리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요란하고 일관성 없는 약속들, 실현 불가능한 요구들, 근거 없는 생각들의 잡탕, 현실성 없는 계획들…. 진리나 정의라고는 전혀 괘념치 않는 기회주의, 분에 넘치는 명성을 뻔뻔하게 추구하는 것,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부추김, 가장 저급한 본능의 이용, 사실의 왜곡…. 이 모든 과열되고 무익한 호들갑들로 이루어진 정치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한다.”
사이다 발언의 주인공인 살라자르는 사실 포르투갈의 독재자다. 자신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에 대한 혐오를 활용했던 것이다. 과거의 이데올로그들이나 현대의 포퓰리스트들 역시 같은 전략을 사용한다. 정치를 정치질로, 정치인을 정치꾼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결국에는 ‘정치’를 ‘통치’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버나드 크릭은 <정치를 옹호함: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에서 정치의 의미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이작 디즈레일리가 말한 것처럼 정치가 “사람들을 속여서 통치하는 기예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정의돼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통치에는 정치적 방식과 그렇지 않은 방식이 있다. 정치는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들을 조정(conciliation)하는 활동”이며, 정치적 통치 방식의 핵심은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능한 한 달래어 설득하는 것”에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이관후 교수(건국대 상허교양대학)는 크릭이 말하는 정치가 통치의 기술, 공적 업무 혹은 권력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타협과 합의로서의 정치”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권력투쟁과 편 가르기에 ‘정치’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정치를 모욕하는 짓이다. 그리고 타협과 합의를 통한 조정이 실종된 우리 정치는 ‘나쁜 정치’가 아니라, 애초에 정치가 아닌 것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치가 아니라 정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치가 그렇지 뭐’라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건 정치가 아니야’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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